유럽과 북아프리카의 경계, 지중해 한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나라 몰타(Malta).
면적은 단 **316㎢**로 서울보다도 작고, 인구는 약 52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 나라는 유럽사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다양한 문명이 교차한 역사적 결절점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아름다운 해변과 중세 도시만 보기엔 아쉬운 몰타의 숨은 이야기들을 세 가지 주제로 나눠 소개합니다.
1. 기사단의 섬, 몰타는 어떻게 ‘군사 종교국’이 되었나?
몰타는 16세기부터 약 250년간 **성 요한 기사단(Knights of St. John)**에 의해 통치된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군사력과 독자적인 외교권을 가진 준국가급 기사단으로, 로마 가톨릭의 이름 아래 해적과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전투 집단이었습니다.
1530년, 당시 몰타를 지배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몰타를 기사단에게 임대했는데, 임대료는 다름 아닌 **매년 팔콘(매 한 마리)**이었습니다. 이 계약은 실제로 18세기까지 지켜졌고, 몰타는 유럽-이슬람 간 종교 전쟁의 전초기지로 기능하며, ‘성전(聖戰)의 섬’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후 1565년 **오스만 제국의 몰타 대공방전(Great Siege of Malta)**은 역사상 가장 치열한 포위 전 중 하나로, 몰타 기사단이 대포와 석궁, 불화살 등으로 방어에 성공하며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격전은 몰타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뿌리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매년 관련 기념행사와 축제가 열립니다. 관광객은 몰타를 ‘아름다운 섬’으로 보지만, 몰타인에게는 기사단의 전통과 전쟁의 기억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죠.
2. 몰타는 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언어 구조를 가졌을까?
몰타의 공식 언어는 **몰타어(Malti)**와 영어입니다. 영어가 널리 통용되긴 하지만, 몰타어는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한 언어로 평가받습니다.
몰타어는 **셈어 계통(아랍어와 같은 계열)**이지만, 문자는 로마 알파벳을 사용합니다. 쉽게 말해, 아랍어 어휘를 이탈리아어 문법으로 영어식 철자로 쓰는 하이브리드 언어인 셈이죠.
예를 들어 몰타어 인사말인 “Merħba”는 아랍어의 “Marhaba”와 어원이 같고, “Dar”는 ‘집’을 뜻하는데 이는 아랍어 “Dar”에서 직접 왔습니다. 하지만 동사 활용, 시제 구조는 이탈리아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문장 구조는 영어의 패턴을 따릅니다.
이 언어는 중세 시칠리아 방언, 북아프리카 아랍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 수많은 언어가 섞이며 만들어졌고, 몰타인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셈어를 모국어로 쓰는 국민입니다.
흥미롭게도 몰타어는 한때 글로 쓰이지 않던 구어체에 불과했고, 1930년대 이후에야 문자 체계가 정립되었으며, 아직도 몰타 내에서조차 표기와 발음, 어휘에 대한 논쟁이 존재합니다.
몰타어는 언어학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언어 실험실’이자, 문화학자들에게는 제국주의와 저항, 혼종의 언어유산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3. 몰타는 왜 EU 내 '조세피난처'로 불리는가?
작고 아름다운 유럽의 섬나라 몰타가 사실상 유럽연합(EU)의 대표적 조세 피난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면입니다.
몰타는 외국 기업에 매우 유리한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특히 법인세 실효세율이 5% 수준으로, 유럽 평균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다국적 기업, 온라인 카지노 업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몰타에 페이퍼컴퍼니 혹은 본사를 등록하고 있습니다.
몰타는 실제로 EU의 탈세 조사 대상국이 되었으며, 2017년에는 탐사보도 기자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가 몰타 정부의 부패와 자금 세탁, 파나마 페이퍼스 관련 비리 등을 폭로한 후 차량 폭탄 테러로 사망하면서 큰 국제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몰타가 얼마나 깊이 글로벌 자금의 흐름과 얽혀 있으며, 동시에 표면적인 민주주의 뒤에 감춰진 권력 구조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기였습니다.
또한 몰타는 **EU 내에서 시민권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투자 시민권 제도'**를 운영해 논란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 러시아, 중동 부유층이 몰타 여권을 취득한 사례가 다수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EU는 몰타에 시민권 제도 폐지 권고를 수차례 내리기도 했습니다.
마무리하며.. 작지만 거대한 기억을 품은 나라, 몰타!!
몰타를 그저 유럽의 휴양지로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
몰타는 중세 종교 전쟁, 제국의 식민 통치, 언어의 융합, 정치 부패와 경제 전략까지 — 수많은 격동의 흔적이 집약된 ‘작은 지중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의 눈에 비친 몰타는 아름답고 조용한 섬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유럽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복잡한 생존의 기술과, 유산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몰타 해변과 리조트만 보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 너머의 맥락을 이해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유럽의 축소판, 현대 세계의 축소판 몰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